5부에서, 스승님은 철학적 논쟁보다 직접적인 영적 체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며 진정한 스승이 구도자를 내면 천상의 빛과 소리 및 보다 높은 세계로 이끄는 법을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방금 아미타불의 세계가 동화 같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다수가 이렇게 생각하겠죠. 『음, 그건 상상이나 환각 혹은 환상일 거야』 그래서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불교를 일종의 상상이나 환각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건대: 아미타불 세계는 존재해요. 나의 몇몇 제자는 입문 후에 그곳에 갔고 몇몇은 입문 순간에 방문했는데 이러한 『나라』를 방문할 때는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이죠. 그저 1초면 갈 수 있고 1초면 돌아올 수 있어요. 눈 깜짝할 사이예요. 마음이 열린 정도나 내면의 통로에 달려 있죠. 모든 것은 내면에 있고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내면의 통로 또는 소위 『마음』 혹은 깨달음이 열린 수준에 달려 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바로 환상이나 상상, 환영이 현실과 다른 점이에요. 그 장소가 환영이거나 상상의 결과물이라면, 다른 이들은 거기 갈 수 없지요. 단지 그 사람만 갈 수 있고, 그 사람도 한 번만 가며 두 번은 안 되는데, 그게 꿈이고 환영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장소가 실제라면, 누구라도 갈 수 있으니, 그 사람 전에도, 후에도, 또 언제라도 와서 그 장소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런 장소로 가는 길을 수련하지 않으면, 그런 장소가 존재함을 알 수 없어요.
또한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특정한 종류의 철학이나 끝없는 논쟁에 바탕을 둡니다. 신은 있는가 아니면 신은 없는가? 또 그것은 왜 그렇고 왜 그렇지 않은가? 나도 예외가 아니에요. 나는 대부분 시간에 가서 강연하는데 여러 종교의 견해를 소개하고 달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과 도에 관한 노자의 말씀, 천국에 관한 주 예수님의 말씀이 다 같다고 그들에게 이해시켜야 하지만 그것이 내 의도는 아니며 좋아하는 주제도 아니에요.
사실 그건 어려워요. 여러분은 아세요? 내가 죽은 후 누군가 나타나 그것에 대해 내가 한 말에 무언가를 덧붙여 비교하며 후세 사람에게 『칭하이 무상사도 부처님과 같은 말씀을 하셨으니 논쟁할 필요가 없다』는 등 설득하려고 하겠지요. 그러니 그렇게 계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교가 있어도 구도자에게 도움은 안 돼요.
우리가 철학에 대해서만 논쟁하고 실제의 길을 보여주지 않으니까요. 『길』은 책을 통하거나 말로 보여줄 수 없고,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했죠. 『내 손가락을 따라 보면 길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 그 왕비가 부처님을 따랐고, 불국토를 보았다면, 부처님을 따라간 것이죠. 손가락은 단지 가르침이나 따르는 것을 의미하며 스승을 믿고 스승이 여러분의 그때 영적 수준에 맞는 곳으로 인도하도록 맡기는 거죠. 그게 손가락의 의미입니다. 그 왕비는 부처님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스승의 가르침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러니 그날 감옥에서 대단히 신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이 세상이 너무 비참하다고 기도했어요. 아들이 자신을 감옥에 가뒀으니 이 세상이 고통과 불행, 불확실함으로 가득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부처님께 우주의 어딘가에 있는 더 안정되고, 더 사랑이 많고 더 친절한 세계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오셔서 그녀를 정토로 데려갔지요. 그리고 아미타 정토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그 체험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전해졌고 그 후 사람들이 그것을 입수해 인쇄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완전한 원본이 보존됐죠.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경전의 내용을 알더라도, 실제로 아미타불 세계를 체험하는 사람은 적어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신실하지 않고 영적인 성향을 보인 여러 생을 거쳐 충분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면, 일반적인 기독교인이 성경에서 언급하는 두 번째 천국이나 세 번째 천국 또는 내면 천국의 신의 빛이나 신의 소리를 체험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요. 가령 기독교에서는 내면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몇몇 체험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 세례 받았을 때 내면의 천국에서 오는 흰빛을 보았습니다. 천상의 성령이 흰 비둘기처럼 내려왔어요.
기억하나요? (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 중 얼마나 그런 높은 체험을 하는 세례를 받았나요? 또는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랐을 때 신을 닮은 큰 불꽃을 보았어요. 그렇게 신은 큰 불꽃, 즉 큰 내면의 빛으로 나타났죠. 사실 그저 내면 천상의 큰 빛이라고 했지요. 신은 내면 천상의 큰 빛이며, 신의 목소리는 내면 천상의 천둥소리 같고 많은 물소리 같다고 해요. 또한 요한은 내면 천상의 나팔 소리를 들었지요. 다른 사람은 세 번째 천국 등에 사로잡혔었고요. 지금은 누가 이런 체험을 하나요? 거의 없지요.
기독교 왕국에는 예외적인 몇몇 성인이 있고 그들은 성경에 언급된 것과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기독교인이나 불교도는 이런 것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종교란 직접 체험이 없으면 공허할 뿐입니다. 그러니 『깨달은 자』라 불리는 이는 마음대로 내면 천상의 빛 거주지 혹은 빛의 차원, 존재의 광명 세계를 갈 수 있는 이들입니다. 적어도 내 제자들은 『깨달은 자』라 불리지요. 내면 천상의 빛을 체험했으니까요.
『깨달은 이』라는 의미는 내면 천상의 빛을 가져야 함을 내포해요. 내면 천상의 빛이 여러분 안에 있어요. 기독교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안의 빛이 어둠이 되지 않도록 하라』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너희 눈이 하나가 되면 네 온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내면 천상의 빛과, 내면 천상의 빛과, 내면 천상의 빛을 말해요. 또한 그것은 많은 종류의 신적인 내면 천상의 소리에 대해 말하는데 천둥소리나 많은 물소리, 천상의 나팔 소리나 하프 소리 그리고 온갖 소리를 언급합니다. 전혀 신을 보지 못해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신의 화현인 내면 천상의 빛을 보거나, 우리에게 천국이 가깝다는 확신을 주려는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 음악을 들어야 해요. 우리가 이제 아미타불을 보지 못하거나 그 세계로 가지 못해도, 최소한 아미타불의 내면 천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아미타불』은 『무량광』을 뜻하니까요. 아니면 적어도 내면 천상의 소리인 아미타불 세계의 소리를 듣고, 새 존재가 노래하는 내면 천상의 소리나, 내면 천상의 나뭇잎 소리나, 내면 천상의 모든 동물 주민 소리나, 부처님께서 설법하며 가르침을 주시는 소리를 듣게 되지요. 최소한 멀리서라도 듣게 되어 어쨌든 우리가 불국토에 대단히 가까이 있거나 불국토의 경계에 온 것을 알게 됩니다. 아니라면 신의 존재와 부처나 불국토의 존재를 어찌 알겠어요?
아미타불에 대해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경전에 쓰여 있기로는 아미타불이 육신을 가지고 성인으로서, 요기로서 수행할 당시 48가지 서원을 세웠다고 하지요. 그 서원 중 하나는: 누구라도 그의 명호를 듣고, 죽는 순간에 아미타불에게 한 번이라도, 신실하게 또 당연히 전적인 헌신과 열망으로 기도한다면, 그를 자신의 아미타 정토로 데려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의 정토는 경전에 의하면 이미 만들어진 곳이거나, 시장에서 사 왔거나, 또는 비어 있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곳이 아닙니다. 아미타 정토는 아미타불의 영적 권능, 즉 그의 고행과 수행으로 만들어졌어요.
이런 것이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두드러지는 점입니다. 이는 단지 그리스도는 그렇게 짧은 문장으로 자신이 의미하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혹은 어쩌면 설명했지만 교회가 볼 때 소화하기 힘든 내용을 삭제했을 수도 있겠지요. 또는 어쩌면 설명했지만 당시 지배 권력이 그것을 지워버렸을 수도 있고요. 무엇이든 일어났을 수 있죠.
이제 아미타불에 관해 말해줄게요. 그렇게 아미타불이 고행과 명상의 덕목을 수행할 때 서원을 세우기를, 훗날 자신이 만든 정토는 수정처럼 맑고 금강석처럼 귀하며 진심으로 원한다면 누구라도 항시 갈 수 있다고 했어요.
내가 이것을 말하는 이유가 뭘까요? 덕과 권능을 갖춘 큰 스승은 우리를 자기 세계로 데려가고 새로운 천국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 예수님의 말과 같죠.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사진: 『거리는 물리적일 뿐이다』











